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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종권의 마이한반도


‘거짓’이 ‘세상’과 ‘시’를 이끌고 간다

-‘시적 상상력’의 재미있는 얼굴•1(사진 : 청라국제도시 호수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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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참말도 많고 거짓말도 많다. 사람들은 누구나 참말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진실을 존중하고 거짓을 경계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런데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우리의 삶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는 참말만 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거짓말이 전혀 없는 세상은 과연 아름다운 세상일까.

 

오래전 어느 지역 식품의약품안전청의 초청으로 두 차례 강의한 일이 있다. 참석자 대부분이 대학원 이상의 학력을 가진 전문 연구자들이었다. 강의를 준비하면서 적지 않게 긴장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정작 강의를 진행하면서는 내 이야기가 그분들에게 충분히 전달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 이유를 나름대로 생각해 보았다. 강의를 듣는 분들은 대부분 이공계 출신이었고, 나는 문학을 하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우리가 사물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방식부터 달랐던 것은 아닐까.

 

물론 문과와 이과의 사고방식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는 없다. 사람의 성격과 생각은 전공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다만 이야기를 풀어가기 위해 잠시 두 가지 사고방식을 대비해 보려 한다. 여기에는 적지 않은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부터 인정해 두자.

 

내게는 두 아이가 있다. 한 아이는 문과를 공부했고 다른 아이는 이과를 공부했다. 대학에 들어간 뒤부터 두 아이의 성격이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 흥미로웠다. 큰아이는 말이 많아지고 감정 표현도 풍부해졌다. 작은아이는 오히려 말수가 줄어들고 꼭 필요한 말만 간결하게 하는 편이었다.

 

물론 타고난 성격의 차이일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이 모습을 보면서 엉뚱한 생각을 해보았다. 혹시 문과에서는 거짓말을 가르치고 이과에서는 참말을 가르치기 때문이 아닐까.

 

이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는 마시라. 어디까지나 문학을 하는 사람의 짓궂은 비유이다.

 

과학은 관찰과 실험을 통해 사실을 확인하고, 그 사실을 설명할 수 있는 원리를 찾으려 한다. 물론 과학에도 가설과 상상력이 필요하다. 반면 문학은 사실로 확인할 수 없는 인간의 감정과 욕망, 기억과 가능성까지 자유롭게 다룬다. 하나의 질문에 반드시 하나의 정답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이러한 차이를 조금 과장하여 과학은 참말을 찾고 문학은 거짓말을 만들어 낸다고 말해보고 싶은 것이다.

 

그렇다면 문학의 거짓말이란 무엇인가. 나는 시를 쓰고 소설을 쓰며 산문과 평론도 조금씩 쓴다. 그런데 이 일이 여간 재미있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일을 그럴듯하게 꾸며내고,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살아 있는 사람처럼 만들어 낸다. 때로는 꽃에게 말을 시키고 바람에게 마음을 주며 죽은 사람을 다시 불러내기도 한다.

 

놀라운 것은 이런 거짓말을 잘할수록 독자들이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독자들은 그것이 실제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감동하고 눈물을 흘린다. 때로는 실제로 겪은 일보다 소설 속의 사건을 더 오래 기억한다.

 

이상하지 않은가. 거짓말을 싫어한다는 사람들이 문학의 거짓말에는 기꺼이 마음을 내어준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거짓말은 사람을 속여 이익을 얻으려는 거짓말과 다르다. 문학의 허구는 사실을 위장하는 속임수가 아니라 사실만으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삶의 의미를 드러내는 방법이다.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일을 통해 실제 삶의 진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시는 특히 그렇다. 시인은 바람이 운다고 말한다. 꽃이 웃는다고 말하고 강물이 슬퍼한다고 말한다. 과학적으로 따지면 모두 틀린 말이다. 바람에는 울음을 담당하는 성대가 없고 꽃에는 웃는 얼굴이 없으며 강물에는 슬픔을 느끼는 마음이 없다.

 

그런데 우리는 그 말을 이해한다. 때로는 바람의 울음에서 자신의 외로움을 발견하고 꽃의 웃음에서 기쁨을 느끼며 강물의 슬픔에서 지나간 세월을 떠올린다.

 

사실이 아닌 말이 오히려 사실보다 깊은 감동을 주는 것이다. 이것이 시적 상상력의 재미있는 얼굴이다. 시인은 세상에 없는 것을 만들어 내지만, 그 만들어 낸 것을 통해 세상에 분명히 존재하는 인간의 마음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시의 거짓말은 진실을 부정하는 거짓말이 아니라 진실에 다가가기 위한 또 하나의 언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는 문학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에서도 참과 거짓의 경계는 생각보다 복잡하다.

 

얼마 전 며느리를 본 뒤의 일이다. 어느 날 길거리에서 며느리가 나를 발견하더니 반갑게 아버님 하고 부르며 달려와 내 손을 꼭 붙잡았다. 아직 그런 친밀한 표현에 익숙하지 않았던 나는 깜짝 놀랐다. 그러나 기분이 나쁘기는커녕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 일을 계기로 며느리에 대한 나의 생각도 더욱 긍정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친구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어떤 친구는 참 솔직하고 활발한 며느리라고 했다. 다른 친구는 요즘 세상에 그런 며느리가 어디 있느냐며 부러워했다. 그런데 또 다른 친구는 조금 더 기다려 보라며 나중에는 시아버지 곁에 오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자, 여기서 한번 생각해 보자. 며느리가 내 손을 붙잡은 행동은 참이었을까, 거짓이었을까. 친구들의 말 가운데 어느 것이 참이고 어느 것이 거짓이었을까. 사실 우리는 그 답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며느리가 진심으로 반가워서 그랬을 수도 있고, 시아버지를 기쁘게 해주고 싶어서 조금 더 적극적으로 행동했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그 행동을 곧바로 거짓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상대방의 속마음을 끝까지 알아내려고 한다. 친절을 받으면 고마워하기보다 먼저 의심하기도 한다. 저 사람은 왜 나에게 친절할까. 무슨 속셈이 있는 것은 아닐까. 나중에 무엇을 요구하려는 것은 아닐까.

 

물론 세상에는 친절을 가장하여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니 모든 친절을 무조건 믿으라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의심만으로는 인간관계를 온전히 유지할 수 없다.

 

사람의 속마음을 완벽하게 알아내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자신조차 자신의 마음을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어제는 진심이었던 마음이 오늘은 달라질 수도 있고, 처음에는 형식적이었던 친절이 시간이 흐르면서 진정한 애정으로 변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끝없이 상대방의 속마음을 캐묻는 일이 얼마나 유익할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누군가 나에게 친절을 베풀었다면 우선 그 친절을 고맙게 받아들이면 된다. 내가 줄 수 있는 친절이 있다면 다시 돌려주면 된다. 그 친절의 깊이를 굳이 저울에 올려놓고 참인지 거짓인지 끝까지 가려낼 필요는 없지 않을까.

 

세상은 정확한 사실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기대하고 상상하며 때로는 착각하기도 한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를 믿고 살아가며, 확인할 수 없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신뢰하기도 한다. 그렇게 불확실한 것들이 우리의 삶을 움직인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사랑한다는 말의 진실을 완벽하게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 말을 하는 순간에는 진심이었더라도 세월이 흐르면 마음이 달라질 수 있다. 그렇다고 처음의 사랑까지 모두 거짓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인간의 마음은 수학 공식처럼 하나의 답으로 고정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하기보다, 우리가 진실의 전부를 알 수는 없다고 말하고 싶다. 진실을 추구하는 일은 중요하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것만이 유일한 진실이라고 믿는 순간 또 다른 오류가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문학은 바로 그 불확실한 세계에서 태어난다. 보이지 않는 마음을 보이게 하고,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들리게 하며, 아직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상상하게 만든다.

 

시인이 만들어 내는 허구의 세계는 현실에서 도망치는 장소가 아니다. 오히려 현실을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또 하나의 창이다. 거짓말은 언제나 나쁜 것이라고 말하기 쉽다. 그러나 모든 거짓을 같은 이름으로 묶을 수는 없다. 남을 속이고 해치는 거짓과 인간의 상상력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내는 허구는 분명 다르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거짓이라는 형식 자체가 아니라 그 거짓이 무엇을 위해 사용되는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세상을 속이기 위한 거짓은 진실을 파괴하지만, 시가 만들어 내는 아름다운 거짓은 때로 진실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시인은 사실이 아닌 것을 말하면서도 인간의 진실에 도달하려 한다.

 

어쩌면 세상은 사실만으로 살아가는 곳이 아니라 사실과 상상, 확신과 의심, 진심과 배려가 함께 어우러져 움직이는 곳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시를 쓰며 세상에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누군가의 마음에 닿아 작은 진실 하나를 일깨워 주기를 바란다.

 

거짓이 세상을 속일 수는 있어도, 시의 아름다운 거짓은 오히려 세상을 깨우는 힘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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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1

이성필 기자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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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글을 읽는 시간, 밖은 밤이고 찬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거짓’이 ‘세상’과 ‘시’를 이끌고 간다.
궁금했던 세상이 환해지고 속이 맑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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